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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조선 성의 완성형태, 수원화성

Category : AD, DESIGN & WEB | 2019. 7. 13. 12:05




주소 :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1-2

완공 : 1796년
설계자 : 정약용
공사책임자 : 채제공
UNESCO 문화유산 : Cultural: ii, iii





1.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 정조 시대 때 세워진 계획도시로,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으로 꼽히는 수원의 화산(현 경기도 화성)에 이장하기 위해 만든 성이었습니다. 묘(현륭원)를 수원의 화산에 옮기다 보니 원래 거기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고, 그 결과 팔달산 아래 신도시 화성이 건설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묘를 이장했기 때문에 만들어야 했던 이 수원 화성은 정조의 이상과 철학, 그리고 정치적인 노림수가 복합적으로 적용된 계획도시였습니다. 먼저 화성 설계에 조선 최고의 실학자인 정약용을 기용 하였고, 화성의 공사 책임자는 남인 출신의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었습니다. 이는 노론 위주로 돌아가던 정국을 타파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던 것이죠. 거기에 더해,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던 목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림1.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2.


그럼 단순히 이런 정치적 노림수에 의거해만 지은 성이었다면 수원 화성은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성으로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단 성 자체의 목적에 굉장히 충실한데, 침략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로서 각종 기능이 집약적으로 잘 구축 되어 있습니다. 먼 거리에서 성벽의 작은 간이 출입구가 보이지 않게 시각적으로 숨겨져 있는 점과 그로 인해 성벽 위에서는 시야 확보가 되지만, 성벽 아래에서는 그 구멍을 올려다보아도 절대 관찰자를 볼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화포의 화력 증대에 인해 성의 방어력이 떨어지는 문제점이 생기게 되었는데 화성은 성벽 뒷쪽에 성벽과 거의 같은 높이의 흙산을 쌓아올려 포탄이 성벽을 관통해도 뒤의 동산이 지탱해주어 성벽 자체가 붕괴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그림2. 동북공심돈과 봉돈)




이런 점 이외에도 수원 화성은 기존의 조선의 성에서 볼 수 없는 가장 큰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읍성과 산성을 모두 갖춘 성곽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즉 생활공간이면서 적군을 상대로 전쟁도 치를 수 있는, 우리의 전통 성곽과 서양의 도시 개념을 접목한 새로운 개념의 계획도시였던 것 인거죠.

화성이 세워지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성곽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마을에 쌓은 읍성과 전쟁에 대비하여 건설한 산성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읍성에서 살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산성으로 이동하여 적과 싸웠는데 수원 화성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는 일찍 실학을 접한 정약용이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여러 도시에 관한 책을 참고하여 화성을 설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또한 백성의 삶과 상업을 중시한 성으로도 유명합니다.
화성이 한양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는 위치에 있는 것을 고려하여 전국의 상인들이 모여 거래할 수 있도록 길을 새로 만들었고, 또한 많은 양의 물건을 거래하는 대상으로부터 소상인들을 보호하였고 가난한 상인들에게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 주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여러 정책이 실시되었고, 이런 정책 덕분에 화성의 경제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의 정책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놀라운 정책이 아닐 수 없던 것이죠.


(그림3. 수원화성 전도)




마지막으로 수원 화성은 조선의 그 어떤 성보다 심미적으로 뛰어남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는 정조가 화성을 축성할 때 아름답게 지으라고 명령을 했기 때문입니다. 화성이 완성 된 이후 정조는 화성을 구경하고 있는데 같이 대동했던 신하 한 명이 외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아름답게 만들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니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정조가 한 주장은 성을 웅장하고 아름답게 만들면 보는 사람의 기를 꺾으므로 성을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정도의 주장이라고 하는군요.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수원화성은 방어 기능과 성벽 안에 갖추어진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각기 다른 모양과 특성을 지닌 건축물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림4. 북동적대와 방화수류정, 그리고 기타 수원화성의 아름다운 SPOT들)






3.
이렇듯 조선 역사상 치밀하게 계산되고 축조된 수원화성이긴 하지만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는데, 일제시대를 거쳐 6.25때 전쟁의 화마로 인해 크게 훼손되게 됩니다. 이후 복원을 계속하게 되고 현재도 복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림5. 6.25 전쟁때 파괴가 된 수원화성의 모습)




그런데 이 수원화성의 복원에는 놀랄만한 사실이 있는데 바로 ‘화성성역의궤’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화성성역의궤는 수원화성이 축조되던 1790년대 당시 정조가 봉조하, 김종수에게 화성의 축조 과정 및 기타 제반 사항들을 모두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남긴 책으로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 6권, 부편(附編) 3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10권 10책의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기술이 매우 자세한데 건물의 격자 하나하나가 가진 모양이나 축성에 사용된 재료를 어느 지방에서 출처하여 공수해왔는지에 대한 내용까지 있으며, 심지어 건설 과정에 참여한 기술자 석수(石手) 642명, 목수 335명 및 기타 일반 백성들의 명칭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화성성역의궤라는 자료를 통해 수 백여년 전의 성을 100% 복원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는 전 세계적으로 수원 화성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림6. 수원화성성역의궤 표지와 내용물 일부)




기록의 나라라 할 수 있는 조선의 꼼꼼함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하게 되는 내용이며 왜 수원 화성이 다른 성들과 궤를 달리하는지를 보여주는 유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자료
위키피디아 수원 화성
경기도 수원시의 화성 안내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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