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볼펜에 관련된 이것저것
(그림1. FISCHER사의 우주 볼펜. 현재 일반인들도 쉽게 구할 수 있다)
1.
아래와 같은 유명한 유머가 있습니다.
“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이 한창 우주개발로 경쟁을 하던 때. 우주환경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던 두 나라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바로 무중력 상태에서는 볼펜을 쓸 수 없다는 것. 이에 NASA는 '백만 달러'의 세금을 들여 우주에서도 쓸 수 있는 펜을 개발했다.
그리고 그때 소련은 연필을 사용했다.“
이 유머는 미국과 당시 소련의 사고방식 차이를 설명함과 동시에 쓸데없는 예산낭비를 한 미국의 멍청함(?)을 나타내는 일화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져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데, 일단 사실여부는 둘째 치고 이런 미국의 노력을 단순히 예산낭비로 치부하는 건 과학에서 Spin off 개념을 무시하는 처사이기도 합니다.
어떤 과학기술을 개발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파생기술로 얻는 이득이 클 때가 있습니다. 돈만 많이 잡아먹는 우주개발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 미국에서도 종종 까이고 있는데 탄소섬유와 아라미드 섬유는 우주선과 우주복 개발 과정에서 탄생한 재료이며, 자동차 내비게이션은 항법위성을 응용해서 나온 것이며, 의료에서 정확한 진단을 위해 필요한 MRI와 CT 역시 달에 착륙한 아폴로 우주선의 디지털 영상처리를 위해 개발된 기술인 것입니다. 그 외 심장박동 조절장치나 비접촉 체온계 역시 우주 개발 과정에서 탄생한 기술들인 것이죠.
다시 우주 볼펜으로 돌아가서, 우주 공간에서 연필이 아닌 볼펜을 써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주선 같이 폐쇄된 환경에서 연필을 쓰다가 나올 수 있는 흑연입자들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우주정거장이나 우주선들은 100% 밀폐가 되어있어 무중력상태에서 연필심이나 연필가루가 둥둥 떠다니다가 눈이나 코에 들어갈 수도 있는데다가 흑연은 전도체로 초기 유인 우주선에서 사용되던 전산 스위치들과 같은 전자기계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또한 우주에서 볼펜을 써야 하는 이유는 임무가 과학적이거나 공학적인 목적을 가졌을 때, 연필같은 영구적이지 않은 기록매체들은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우주 볼펜에 대한 저 유머의 오류는 NASA는 백만 달러의 세금을 들여서 우주 볼펜을 개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NASA의 우주비행사들도 초창기엔 연필을 사용했었는데 제미니 프로젝트의 경우 NASA는 휴스턴에 있는 Tycam Engineering Manufacturing, Inc.에서 1965년, 기계식 연필을 주문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때 연필 하나의 가격이 무려 128.89 달러였다는 것. 그래서 이거 때문에 세금을 낭비하는 거 아니냐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에 Paul C. Fisher가 Fisher Pen Co를 세우고 백만 달러를 들여 우주 볼펜을 개발하게 됩니다. 그리고 NASA에 납품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전의 기계식 연필 가격 논란 때문에 매우 엄격한 테스트를 거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1967년, NASA의 관리자들은 아폴로 우주 비행사들에게 이 펜을 제공하는데 동의하고 펜 하나당 6달러라는 나름 합리적인 가격에 400개를 구입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소련에서도 1969년 2월, 총 100개의 우주펜과 1,000개의 잉크 카트리지를 구입해서 썼다고 합니다. 소련도 연필을 쓴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3.
우주 볼펜은 -34℃부터 121℃ 상황에서도 작동되며 물속이나 무중력상태는 물론, 어떤 각도에서도 쓸 수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젖은 종이에도 필기가 가능하다는군요.
이런 우주 볼펜의 원리는 고압의 질소를 사용하여 잉크를 강제로 펜 끝으로 밀어내는 원리를 취하고 있어 무중력에서도 사용이 가능 한 것입니다. 이때 사용하는 질소의 압력은 일반 대기압의 2배에 해당되며, 이 가압질소는 공기를 차단하여 펜의 유통기한은 약 100년 정도이며, 잉크도 일반볼펜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끈적하게 만들어 치약 정도의 점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2. 우주 볼펜의 작동 원리)
거기다가 볼펜 끝 부분에 있는 볼도 조금 특수하게 만들어졌는데, 잉크의 점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종이에 효과적으로 잉크를 묻히려고 표면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볼 표면의 구멍에 묻은 채로 구슬이 구르는 대로 깎여져 나가면서 종이에 쓰여지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이래저래 이 볼펜을 개발하는데 괜히 백만 달러가 들어간 것이 아닌 것이죠.
(그림3. 특허를 받은 우주 볼펜의 볼에 관련된 그림)